반도체 시장에서 다시 ‘슈퍼사이클’ 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엔비디아, 현대자동차의 최고 경영진이 치킨집에 모여 앉아 폭탄주를 기울이는 모습까지 비춰진 이상, 시장의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반도체 호황은 2017~2018년 메모리 가격 급등으로 이뤄졌고, 그 이면에는 IT·DT 수요 급증이 있었습니다. 소비자용 메모리 수요는 스마트폰, 노트북, 태블릿 등의 개인 IT 기기 내 고화질 사진·동영상 저장 및 고사양 앱 구동을 위한 고용량 NAND·DRAM 탑재량이 늘어나면서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또한 2016~2018년 글로벌 기업들의 클라우드 전환이 본격화되며, 글로벌 데이터 센터의 확대에 따른 서버 DRAM 탑재량이 3~4배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IT·DT 기반 수요는 필연적으로 하락세에 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IT 기기는 교체 주기에 따라 일정 기간의 수요 증가가 곧 그 사용 기간 동안의 수요 감소를 의미하고, 기기 사양이 일정 수준으로 발전하면 교체주기는 길어집니다. 기업들의 DT 수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RP·CRM의 클라우드화가 한 번 완료되고 나면 유지보수 단계로 전환됩니다. 여기에 수요 급등 후, 1~2년을 시차로 대규모 CAPA 증설이 이뤄짐에 따라 공급과잉, 가격급락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례로, 2019년 4분기 DRAM 가격은 2018년 3분기 대비 40%나 하락했습니다.
IT·DT가 촉발한 슈퍼사이클이 기기 교체로 인한 사이클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AI가 견인하는 슈퍼사이클은 데이터 누적, 연산량 증가에 따라 이론상 무한 확장이 가능합니다. AI는 학습 데이터가 쌓일수록 모델이 커지고, 그 모델이 다시 데이터 생성을 촉발하는 피드백 루프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AI는 단일 제품에 귀속되지 않고, 전 산업에 걸쳐 데이터가 누적되어, 연산이 고도화되며 수요가 지속적으로 확장됩니다.
AI는 수요뿐 아니라 공급의 형태도 바꿔 놓았습니다. 과거 반도체 밸류체인은 세트 메이커가 신제품의 수요를 예측해 주문을 내고, 공급자가 그에 맞춰 생산을 조정하는 구조였습니다. IDM은 예측된 수요를 기준으로 CAPA를 늘렸고, 예측이 빗나가면 재고가 쌓이며 가격이 출렁였습니다. 이른바 ‘수요–공급 간 차이(갭)’가 상승세와 하락세를 반복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AI 시대의 반도체 공급망은 전혀 다릅니다. 이제는 소수의 핵심 기업들이 초기 단계부터 함께 개발에 참여하며, 제품 사양과 기술 방향을 공동으로 설계합니다. 고객의 주문이 아니라 고객의 전략을 수행해 나가는 형태입니다. 따라서 CAPA 확장은 예측이 아니라 실시간 대응의 결과가 되었으며, 시장의 리듬이 ‘예측–증설–조정’에서 ‘공동설계–동기화’로 바뀌었고, 그만큼 수요–공급 간의 차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AI가 촉발한 이번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피드백 루프와 공급의 실시간 대응으로 인해 과거와 같이 3~4년을 주기로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 과거와 현재의 반도체 사이클 구조 비교 | ||
|---|---|---|
| 구분 | 과거 IT·DT 사이클 | AI 슈퍼사이클 |
| 수요 구조 | 스마트폰·노트북 중심, 교체 주기형 | AI 학습·생성 기반, 누적형 |
| 공급 구조 | 수요 예측 후 CAPA 증설 | 고객 전략 기반 실시간 대응 |
| 관계 구조 | 세트 메이커 중심, 단발성 주문 | 공동 개발, 지속적 협력 |
| 사이클 패턴 | 3~4년 호황–불황 반복 | 구조적 성장 지속 가능 |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명백히 회복세에 들어섰습니다. 2023년 매출은 5,260억 달러에서 2024년 6,305억 달러로 반등했고, 2025년에는 7,009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1) 이는 단순한 재고조정을 넘어, 수요의 중심이 바뀌며 시장의 펀더멘털이 회복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설비 투자(WFE)도 빠르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2023년 910억 달러 수준이던 투자가 2025년에는 1,25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2) 특히 300mm 설비 지출은 2025년에 1,070억 달러를 돌파할 전망으로, AI 반도체 전환이 자본적 지출을 직접 자극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HBM(High Bandwidth Memory)의 급성장이 이번 상승세의 상징입니다.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HBM은 2025년 DRAM 비트 출하량 기준 약 10% 이상, 매출 기준으로는 3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는 단가 인상이 아니라, 제품 포트폴리오 구성 변화에 기반한 구조적 수요 확장입니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3E 생산라인은 2025년까지 전면 가동 상태이며, 마이크론 또한 2025년 양산 확대를 공식화했습니다.
공급 측면에서도 부족이 곧 호황의 신호가 되고 있습니다. AI 칩의 핵심 공정인 CoWoS, InFO, SoIC 등 첨단 패키징의 CAPA가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TSMC는 CoWoS 생산능력을 2024~2025년에 걸쳐 두 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회복되는 시점은 2025~2026년으로 전망됩니다.3) 즉, 과거에는 재고가 쌓이는 것이 불황의 신호였다면, 지금은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호황의 신호입니다.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시장이 실제 수요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2024~2025년의 상승세는 단일 요인에 기댄 것이 아닙니다. AI 인프라 수요의 폭발, 공급 구조의 질적 전환, 그리고 글로벌 장비투자의 재개가 동시에 맞물린 입체적 상승세의 시작입니다.
1) WSTS 2025 Spring
2) SEMI, 2024년 중간 전망
3) TSMC 2Q24 컨퍼런스콜, FT·Barron’s 보도
AI가 만들어낸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모든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AI 수요는 기대와 투자로 먼저 형성된 수요입니다. 아직까지 AI가 기업의 실질적인 재무 성과로 연결되었다고 말하기에는 근거가 제한적입니다.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은 생성형 AI를 도입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매출 혹은 이익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AI의 실증, 즉 재무적 효과가 입증되어야 AI 인프라 투자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AI가 혁신에서 수익 모델로 넘어가는 순간, 반도체 수요는 일시적 기대가 아닌 구조적 수요로 전환될 것입니다.
정치적 리스크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AI 시대의 반도체 공급망은 기술 블록화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 주요 국가 간의 반도체 동맹 구도는 여전히 AI 연합의 확산을 제약합니다. AI 반도체의 핵심인 GPU, HBM, 첨단 패키징이 특정 기업이나 국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공급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AI가 만든 이번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단순한 호황이 아니라, 산업의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입니다. 이때 기업이 해야 할 일은 시장의 흐름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입니다.
AI 시대의 반도체는 완제품 납품이 아니라, 고객의 전략을 함께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HBM3e 규격을 사전에 공동 설계하며 차세대 메모리 로드맵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또한 AMD, 구글 등 주요 고객사와 AI 메모리·패키징 기술을 동반 개발 중입니다. 이처럼 고객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함께 구현할 파트너’이며, 그 역량을 만들어 가는 기업만이 시장의 중심에 설 수 있습니다.
AI 수요는 폭발적이지만 불규칙합니다. 이제 CAPA는 시장 전망표를 보고 미리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핵심 고객의 로드맵에 맞춰 설계·운영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범용 제품을 대량 생산해 쌓아두는 방식이 아니라, 소수의 전략 고객, 명확한 사양, 긴밀한 일정에 맞춰 유연하게 증설과 전환을 반복하는 체계가 중요해졌습니다.
TSMC는 2024년 2분기 실적발표에서 ‘향후 첨단 공정 증설은 고객의 AI 수요와 패키징 일정에 맞춰 진행한다’고 밝히며, 5nm·3nm 라인의 CAPA 확장과 CoWoS 패키징 투자를 동시에 추진하였습니다. TSMC의 주요 고객인 엔비디아, AMD, 애플은 제품 개발 초기에 TSMC와 엔지니어링 로드맵을 공유하고, 이에 맞춰 TSMC는 특정 노드와 패키징 공정의 생산 순서를 조정합니다. 즉, CAPA는 더 이상 예측 기반 투자가 아니라 고객 일정에 동기화된 운영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역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HBM은 기존 DRAM이나 NAND처럼 수요를 예측하고 생산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NVIDIA, AMD 등 주요 고객과 HBM3E, HBM4 개발 일정 및 물량을 사전 협의하며, 이에 따라 청주 M15X, 용인 클러스터 중심으로 CAPA를 단계적으로 확충 중입니다. 2024년 하반기 기준 HBM 라인은 이미 2025년까지 모두 예약된 상태이며, 신규 투자 역시 고객 프로젝트 일정에 맞춘 증설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과잉 생산을 피하고, 고객과의 신뢰를 강화하는 새로운 CAPA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국 CAPA 확장은 단순한 설비 투자가 아니라 고객의 전략과 연계된 민첩한 대응력의 문제입니다. 누가 더 빠르게 고객의 전략을 읽고, 필요한 순간에 CAPA를 제공할 수 있는지, 그 기민함이 이번 사이클에서 생존을 결정짓습니다.
AI 반도체는 더 이상 설계–생산–판매로 구분되는 단순 제조 산업이 아닙니다. 설계, 패키징, 장비, 서비스, 클라우드가 긴밀히 맞물린 복합 생태계입니다. 각 영역은 이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성장을 끌어올리는 상호 의존적 네트워크로 작동합니다.
엔비디아는 이 구조를 가장 먼저 완성하여, 시스템 파운드리(TSMC)–HBM(SK하이닉스)–서버 OEM(델, 슈퍼마이크로)–클라우드 사업자(마이크로소프트, AWS)로 이어지는 AI 반도체 밸류체인을 하나의 통합 생태계로 엮었습니다. 칩 설계부터 모델 학습, 데이터센터 운영까지의 밸류체인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설계된 사례입니다. 즉, 엔비디아는 더 이상 GPU만 파는 기업이 아니라, AI 시대의 컴퓨팅 생태계 전반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터가 된 것입니다.
TSMC 또한 단순한 위탁생산 기업이 아닙니다. 첨단 패키징(CoWoS, InFO, SoIC)과 EDA 툴 협업을 통해 AMD, 애플,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의 AI 플랫폼을 함께 설계합니다. TSMC의 강점은 누구보다 빠르게 고객의 미래 제품 구조를 미리 알고, 그 생태계의 중심에서 기술표준을 사실상 주도한다는 점입니다.
메모리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SK하이닉스는 단순 메모리 공급자가 아니라, HBM을 중심으로 한 AI 반도체 생태계의 코어 멤버로 자리 잡았습니다. 엔비디아, AMD, 인텔과의 HBM 사전 공동검증 과정을 통해 칩 구조와 인터페이스 규격을 함께 정의하고, 이를 기반으로 AI칩–메모리–패키징–서버가 일체화된 아키텍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은 AI 반도체의 표준을 함께 정하는 멤버가 된 것입니다.
연합의 힘은 개별 기술을 압도합니다. AI 반도체 생태계는 이제 새로운 기준을 함께 만들어 가는 관계가 핵심인 산업입니다. 특정 기업의 기술이 아무리 앞서 있어도, 생태계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지 않으면 시장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즉,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를 결정합니다.
AI가 만든 이번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단순한 호황의 시작이 아니라, 산업의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입니다. 즉, 반도체 산업이 기술 중심의 제조업에서 관계 중심의 전략 산업으로 재정의되는 순간입니다.
과거 반도체 사이클이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 만들어낸 가격의 파도였다면, 이번 슈퍼사이클은 AI의 지속적 수요 확장에 기업 간 협력으로 대응해 나가는 새로운 해류의 시작입니다. 이제 반도체 산업은 누가 더 많은 칩을 찍느냐가 아니라, 누가 생태계를 설계하고, 그 중심에서 타이밍을 조율하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합니다. 즉, 이제 반도체 기업들은 고객이 만든 수요를 따라가는 회사에서 고객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로 변해야만 합니다.